부자와 거지 나사로가 간 곳은 지옥과 천국인가?
예수님의 비유(누가복음 16:19-31)는 부자와 거지, 죽음 전후의 상황, 그리고 고통과 위로라는 뚜렷한 대조를 보여줍니다. 따라서 부자가 고통받는 '지옥'에 있다고 하셨기에, 나사로가 간 곳은 '천국'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천국'(하늘나라) 대신, 당시 유대인들의 사후 세계 개념인 '아브라함의 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이 비유를 듣던 바리새인들에게 '아브라함의 품'은 의인이 죽음 이후 위로받고 평안히 쉬는 곳입니다. 그들의 조상이자 믿음의 상징인 아브라함의 '품'은 하나님의 백성이 받을 유산, 즉 상급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기 때문이죠.
중간 상태: 지옥(음부)과 아브라함의 품
이 세상에서의 삶이 끝난 후, 나사로는 천사들에 의해 '아브라함의 품'으로 옮겨졌고, 부자는 땅에 묻혔습니다(누가복음 16:22). 이후 부자는 고통받는 지옥에, 나사로는 위로받는 아브라함의 품에 있는데, 서로 얼굴을 알아볼 정도로 가까운 거리입니다. 이는 그들이 땅속에 있는 '음부'라는 장소에 함께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죽은 후 의인과 죄인 모두 땅속에 있는 음부라는 곳으로 간다고 믿었기 때문이죠. 당연히, 악인의 형벌 장소와 의인의 쉼터는 함께 땅속에 있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비유 속의 '지옥'이 최후 심판 이후 악인이 영원한 멸망이나 형벌을 받는 최종적인 '게헨나 지옥'이 아닌, 죽음 이후 심판 전까지 머무는 중간 상태인 '하데스'(스올, 음부)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의 품' 역시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하는 궁극적인 영광의 장소, '새 하늘과 새 땅'이 아닌, 그곳에 가기 전에 잠시 머무는 중간 거처로 이해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하늘나라'(천국)는 문자 그대로는 하늘에 있는 나라라는 의미이지만, 그 핵심은 장소성보다는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영역이라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계신 곳이 하늘이기에 '하늘나라'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늘나라'의 본질적인 의미, 곧 하나님의 나라임을 이해한다면, 의인의 임시 쉼터인 '아브라함의 품'이 반드시 하늘에 있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낙원과 천당 그리고 아브라함의 품의 관계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함께 달린 강도에게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누가복음 23:43)라고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품'과 '낙원'이 같은 장소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의 약속이 거짓이 되고, "예수님께서 지옥에 내려가셔서 죄인들에게 선포하셨다" (베드로전서 3:19)거나 "예수님이 음부에 버림받지 않았다"(사도행전 2:31)라는 성경 말씀 또한 오류가 됩니다.
다만, 땅속이라는 장소는 문제가 되는데, 사도 바울이 "셋째 하늘 곧 낙원"(고린도후서 12:2-4)에 다녀왔다며 낙원이 하늘에 있다고 했거든요. 예수님 또한 제자들에게 "내가 아버지께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겠다"라며(요 14:2-3) '천당', 곧 하늘에 있는 거처를 약속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를 구주로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의 임시 거처는 하나님 아버지 곁, 곧 하늘에 있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이러한 장소의 딜레마를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 이전인 구약 시대에는 의인들이 땅속에 위치한 '아브라함의 품'으로 갔지만, 신약 시대의 성도들은 하늘에 위치한 처소로 간다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이 두 장소가 여전히 땅속과 하늘에 각각 나뉘어 존재하는지, 아니면 일부 주장처럼 예수님의 부활 이후 하늘로 옮겨져 하나로 합쳐졌는지는 성경이 명확하게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최종 심판 전까지 의인과 악인이 나뉘어서 머무는 중간 거처인 낙원(천당)과 지옥의 존재와 그 개념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비유를 통해 엿보는 낙원과 지옥의 모습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부자인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신 이유는 아브라함의 후손은 하나님의 백성이기에 살아서는 복을 받고 죽어서는 자동으로 천국에 간다는 그들의 자만이 잘못임을 알려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지옥에 가고,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가난한 삶을 산다고 멸시하던 거지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약 이 비유가 예수님께서 임의로 꾸며낸 허구가 아니고, 당시 사람들이 믿었던 낙원과 지옥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사실에 입각한 이야기라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그곳에서 어떤 상태에 놓이는지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비유 속의 부자가 세상에 남겨진 형제들을 걱정하는 모습은 죽음 이후에도 이생의 감정과 관계가 지속될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그러나 만약 사랑하는 이들의 장래를 끊임없이 걱정해야 한다면, 천국에서 누리는 진정한 위로와 평안이 퇴색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또한, 부자는 영적인 고통뿐 아니라 목마름과 불꽃 속에서 타는 듯한 육체적인 고통을 호소합니다. 게다가, 부자는 나사로를 알아봅니다. 이는 그들이 생전과 비슷한 모습이라는 이야긴데, 천국가서도 여전히 배가 나온 나의 모습이라니? 실망감은 잠시 접어두더라도, 이 세상에서 사용하던 육체는 무덤에서 이미 썩어 없어졌고, 아직 최종 부활 이전이므로 영원한 부활의 육체를 얻지도 못한 상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다음 포스팅을 기약하겠지요?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요 5:28-29)
"바다가 자기 속에 있던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지옥도 자기 속에 있던 죽은 자들을 넘겨주매 그들이 각각 자기 행위들에 따라 심판을 받았고"(계 20:13)
지옥에 내려가신 예수님?
혹시,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기 전 사흘 동안 어디에 계셨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물론 관심이 없거나, 답을 모르더라도 하나님의 자녀로 사는 데 아무 지장 없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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